[인문] 필연적 혼자의 시대 – 김수영, 다산북스, 2026.
나 혼자 찾아 나서는 삶의 의미
삶이라는 도박
생각보다 삶은 운과 우연에 좌우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능력과 실력이 많은 것을 바꿔 놓습니다. 재능 있는 분들이 능력을 쌓아서 꽃피우는 재능은 아름답습니다. 손흥민 선수의 환상적인 골, 김연아 선수의 우아한 피겨 스케이팅 연기, 다재다능한 연기자들의 신들린 듯한 연기. 스포츠 스타들, 음악가들, 연기자들, 작가들, 그리고 그 외에 많은 영역에서 재능은 아름답게 피어납니다. 하지만 운과 우연도 많은 곳에서 작용합니다. 최고의 재능을 가진 사람이라도 순간의 선택으로 그 재능이 금방 사라져 버리기도 합니다. 당장 우리의 삶에서도 “만약 …했다면”을 들이대기 시작하면, 우리의 재능과 노력으로 전부 이뤄진 것이라고 장담하기 어려울 것 같습니다. 하다 못해 출근길 교통 수단이나 도로 선택, 교통 체증의 정도조차 우리의 출근 시간 지각 여부에 영향을 끼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어쩌면 삶이라는 도박과 매일, 매시간, 매순간 마주하고 있는 것인지 모릅니다.
함께 있다는 환상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것은 본능인 것 같습니다. 오래전부터 살아남는 확률을 높이기 위한 움직임이라는 해석도 그럴듯하게 들립니다. 그래서 우리는 학교에서, 직장에서, 취미 모임에서 무리에 속하기를 원하는 것 같습니다. 가족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낼 때, 친한 친구들과 모임을 가질 때 우리는 그 속에서 함께 있음을 더 기쁘게 즐기게 됩니다. 그것이 어렵거나 부담스럽다면 SNS에서도 시도할 수 있습니다. 누군지 잘 몰라도 가까워지거나 무리를 지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은 지속 가능한 것일까요? 인생 전체로 시간대를 늘려 놓고 보면,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가족들과 끝까지 함께 할 수 있을지조차 불확실해집니다. 불화가 분쟁으로 번지면 남보다 못한 관계가 될 수도 있습니다. 친한 친구는 서로 처지와 상황이 달라진 채 시간이 흐르면 이전의 무리에서 멀어지고, 현재 자신과 맞는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SNS의 친분은 더 허약해 보입니다. 1-2개월의 자리 비움만으로 완전히 관계가 소멸할 지도 모릅니다. 결국 무리에 속하고자 하는 본능에도 불구하고, 우리에게 남는 것은 함께 있다는 환상과 혼자라는 사실인 것 같습니다.
좋은 삶을 위해 좋은 죽음을 묻다
1인 가구들이 죽음 그 자체보다 “죽어감”을 걱정한다는 대목이 인상적이었습니다. 죽음 자체에 대한 두려움보다,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준비없이 맞이하게 될 두려움이 더 크다는 설명이었습니다. 1인 가정이어서 자신이 죽음에 이르는 과정과 그 사후 처리에 대한 대비를 더 신경쓰게 되는 모양입니다. 처음에는 슬프게 느껴지다가, 오히려 긍정적인 면으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가 병원과 장례식장, 상조회사에 미루고 있을 뿐, 아프고 죽음에 이르는 과정에 대해서는 각자 준비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입니다. 최대환의 책 “좋은 삶을 위해 좋은 죽음을 묻다”의 이야기처럼, 좋은 죽음에 대한 생각을 빠뜨린 채 좋은 삶에 대한 생각을 완성할 수는 없기 때문이기도 합니다. 독후감 제출 시한처럼, 레포트 제출 마감 시간처럼, 우리의 삶에 끝이 있다는 것이 우리가 삶에서 더 노력하고, 더 의미를 찾게 되는 원동력이 됩니다.
몽테뉴와 파스칼은 모두 죽음에 대한 사유는 자기 인식으로 나아가는 가장 중요한 길이라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그들의 통찰처럼 우리는 죽음을 살펴봄으로써 ‘생각하는 갈대’인 인간에게 자신의 유한함을 끌어안고 주어진 인생을 보람 있게 살며 영원으로 향할 수 있는 길이 열려 있음을 확인하게 될 것입니다. – p. 320, “좋은 삶을 위해 좋은 죽음을 묻다”, 최대환, 어크로스, 2026.
[책 속 문장들]
P. 50.
바로 ‘가족’이 차지하던 중심축을 자기 자신, 즉 ‘자아self’가 대신하게 된 현상 말이다. 이들에게 노동은 가족을 부양하는 활동이 아니라 자기 자신을 만들어가는 활동이었고, 여가는 가족을 돌보는 시간이 아니라 자신을 계발하고 회복시키는 시간이었다. 후기 자본주의 사회의 생산-재생산 메커니즘이 가족 중심에서 자기 중심으로 전환된 것이다. 나는 이를 자기생산-자기재생산 메커니즘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P. 55.
사회학자 앤서니 기든스는 이를 자기 준거 시스템self-referential system 이라고 불렀다. 현대사회에서 개인은 타인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충성하는 방식으로 신념 체계를 만들고, 자신이 무엇을 선택하고 어떻게 살 것인지에 대한 방향을 개인 내면에서 설정한다. 과거에는 가족, 공동체, 종교 같은 외부의 준거점이 삶의 방향을 결정했다면, 이제는 자기 자신이 모든 선택의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나는 무엇을 원하는가?’, ‘나에게 의미 있는 것은 무엇인가?’, ‘나는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가?’, 그리하여 결국 ‘나는 무슨 일을 하며 살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일을 할 때도 가장 중심에 놓인다.
P. 100.
바우만은 후기 산업사회에 개인들이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는 모습을 쇼핑에 비유한다. 늘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서지만 결코 만족에 는, 일종의 쇼핑 중독이라는 것이다.
P. 124.
당신의 삶이 잘 풀리지 않는다면? 그것은 당신이 충분히 노력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실직했다면? 당신의 경쟁력이 부족했기 때 문이다. 아프다면? 건강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우 만은 개인화된 사회의 자기책임self-responsibility이 자기파괴적인 속성 을 품고 있다고 본다. 개인이 일터에서든 집에서든 멈추지 않고 자기를 갈아 넣도록 몰아가기 때문이다.
P. 272.
혼인과 혈연으로 묶였다고 다 ‘진짜 가족’은 아니라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사이가 좋지 않고 왕래도 거의 없어서 가족이라고 해도 남보다 못한 관계인 경우도 많다. 이런 이유로 최근 가족사회학자들은 혼인과 혈연관계만 충족되면 가족으로 보는 기존의 관점을 비판해 왔다. 「가족의 탐구 Family Connections』의 저자 데이비드 모건 David Morgan은 가족은 주어진 상태라기보다 어떤 행동과 역할을 다할 때 비로소 완성되는 관계로 이해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P. 330.
오히려 적지 않은 1인가구가 염려했던 지점은 사망에 이르기 전에 보내야 하는 시간이었다. 카스텐바움과 모어먼의 죽어감-사망-사후로 이어지는 죽음의 과정으로 보자면, 죽어감dying에 해당하 는 기간이다. 죽기 전에 크게 아프지 않고 사망하길 바라는 것이다. 자신이 지병을 앓고 있거나, 가까운 사람의 고통스러운 투병 생활 을 지켜본 사람들은 이런 바람이 더 컸다. 백승민 씨처럼 부모님이 병환으로 고생하다 돌아가신 모습을 지켜본 1인가구들은 자신은 이런 고통 없이 “깔끔하게” 떠날 수 있길 바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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