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안삼환 옮김, 민음사, 2026.
한국 문학을 한국 문학이라 부르지 못하고.
구한 말 격변 속을 지나는 개인의 기록
우리는 스스로를 아날로그와 디지털, AI 이전과 이후를 모두 살아가는 격변의 세대로 일컫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삶 자체가 격변 그 자체가 아니었을까요? 처음에는 서당식 전통 한학 교육을 받다가 신식 교육으로 바뀌고, 곧 일제 치하의 교육을 받아야 하는 처지였습니다. 영어 입시 공부가 쉽지 않아서 의학부 진학을 선택했다는 것도 일종의 겸손일 텐데, 심지어 독일에서 공부를 이어 갑니다. 게다가 세계 대전의 시기를 살면서 내 나라의 보호를 전혀 받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는 것은 어떤 고독일지 상상이 어렵습니다. 이 모든 과정을 간결하고 담담하게 적어 나갑니다.
3.1운동 현장의 기록과 그 이후
3.1운동 참여 전의 고민과 목격한 현실을 가감없이 기록합니다. 저자의 서술 방식이 무척 간결하고 담담한 편이라 더 울림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겁이 많고 내성적으로 보이는 저자가 유럽 유학을 결심하고 저자의 어머니가 이를 지지하는 모습도 인상적입니다. 3.1운동 참여 사실로 잡혀 갈 위험도 있었겠지만, 심지어 일제시대에 미지의 세계로 유학을 떠나는 저자의 결심이나, 그를 믿고 지지하는 어머니의 마음도 결연하기만 합니다. 격변기 속에서 전에 없던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책임을 지며 살아가는 것, 그에 따라 감내해야 하는 외로움과 그리움이 담담한 필체로 그려집니다. 직접 겪은 적은 없지만 듣거나 읽어본 적이 있어서 아예 낯설지는 않은 일상, 그리고 격변의 시간 속 저자의 삶이 번역서임을 잊을 정도로 간결하게 서술되어 있습니다.
한국 문학이란 무엇인가
저는 이 작품이 한국 문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땅에서 자고 나란 저자가 당시의 정치 외교적인 현실로 인해 겪은 삶을 독일어로 쓴 이 책이 한국 문학이 아닐 이유가 있을까요? 일제 강점기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말로 쓰고 발표하여 출판해야 한국 문학일까요? 만약 그런 목소리가 있다면 당시 시대 상황에 비추어 비현실적인 요구가 아닐까요? 차이에 주목해서 나누기보다 우리 윗 세대의 삶을 담은 작품이 한국 문학이라는 인식의 편에 서고 싶습니다.
[책 속 문장들]
P. 30.
그럼에도 나 역시 세 대를 맞았는데, 그 매가 내게는 엄청 아팠다. 그러 나 아픔은 가장 고약한 것이 아니었다. 그 아픔쯤은 견뎌 낼 수 있었다. 더 고통스러웠던 것은 우리 둘이 매 맞는 것을 동 정심에 가득 차서 바라보는 모든 아이들의 눈앞에서 견뎌 내 어야 했던 치욕이었다.
P. 72.
“정말 그렇단다!”라고 아버지가 말씀하셨는데, 어머니는 두 눈을 지긋이 껌뻑이시면서 옆으로 나를 바라보셨다. 나는 어머니가 그때 나를 기특하게 생각하는 것인지, 혹은 나를 비웃고 계시는지 잘 분간할 수가 없었다. 그건 내게는 아무래도, 정말 아무래도 전혀 상관없었다. 달은 아주 밝게 비치고 있었고, 복숭아들은 향기를 내뿜고 있었으며, 나는 술잔 앞에 앉아 내 아버지의 친구 노릇을 하고 있었다.
P. 109.
그러하였다, 그것은 왕의 서한이었다. 내가 내 인생에서 읽게 된 처음이자 마지막인 왕의 편지였다. 그것은 작별의 편지, 즉 500년 이상 우리를 보호해 왔던 한 왕가(王家) 전체가 물러나는 글이었기 때문에, 나는 엄숙하고도 슬픈 감동을 느꼈다.
P. 164.
나는 그 피리를 천천히 입에다 댔다. 그리고 그 고귀한 의복을 입은 노신사가 피리를 불기 시작했다. 우리 주위는 쥐 죽은 듯이 고요해졌다. 그 예술가가 이리저리 걸으면서 점점 더 흥분해서 고전곡을 하나씩 차례로 밤하늘 안으로 연주해서 날리는 동안 아무도 꼼짝하지 않았다. 남쪽에서는, 일본인들이 사는 새 구역에서는 아직도 수많은 빛이 번쩍이고 있었으며, 북쪽에서는 옛 조선이 어 두움 속에서 잠들어 있었다. 삼각산 위에서는 흑단처럼 새까만 밤하늘이 펼쳐져 있었고, 옛 창덕궁은 과거 속으로 침묵해 들어가고 있었다.
P. 178.
내가 오후 2시에 파고다 공원으로 갔을 때, 그 공원은 이미 경찰들에 의해 포위되어 있었고 담장 안쪽의 작은 공간은 사람들로 꽉 차서 나는 열 발짝도 걸을 수 없었다. 내 근처에서 나는 익원도, 그 어떤 학우도 찾아낼 수 없었다. 나는 담장 한 쪽 구석에 서서 점점 더 많은 대학생들이 입구를 통해 밀려들고 있는 것을 바라보았다. 갑자기 깊은 정적이 찾아들었고, 나는 누군가가 정자의 연단으로부터 조선 민족의 선언문을 낭독하는 것을 보았다. 무엇을 이해할 수 있기에는 내가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한순간 침묵이 흐르더니, 이윽고 우렁찬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고, 그 외침 소리는 더는 그칠 줄 몰랐다. 그 작은 공원이 뒤흔들렸고 바야흐로 폭발이라도 할 것 같았 다. 공중에는 서로 다른 크기, 서로 다른 내용의 전단들이 회오리치고 있었으며, 그 수많은 사람들의 무리가 이제 공원으 로부터 쏟아져 나와, 아직도 여전히 우렁찬 ‘만세’를 외치면서, 그리고 사방팔방으로 전단들을 흩뿌리면서, 시내로 행진해 가기 시작했다.
P. 184.
안개와 어둠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시내를 훨씬 벗어나는 길까지 나를 배웅해 주셨다. ‘너는 용기가 없는 사람이 아니다.”라고 어머니는, 우리 둘이 줄곧 침묵을 지키며 걸어온 뒤에, 말씀하셨다. “자주 겁을 먹기도 했지. 하지만, 넌 네 갈 길을 한 번도 빗나가지 않았어. 나는 너를 깊이 신뢰한다. 부디 용기를 내렴! 너는 어렵잖게 국경을 넘어갈 게다. 그리고, 마침내 너는 유럽으로도 가게 될 것이다. 이 어미 걱정은 하지 말아라! 난 네가 다시 여기 올 때까지 조용히 기다릴 것이다. 세월은 정말 아주 빨리 지나간단다. 그러나 우리가 다시 보지 못한다 하더라도, 너무 슬퍼하지 말아라. 넌 내 인생에서 내게 많은, 대단히 많은 기쁨을 선사해 주었다. 자, 내 아들, 이제 혼자 계속 가거라!”

[링크][책] 압록강은 흐른다 – 이미륵 (교보문고)
[링크][문학] 바라모 – 세사르 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