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피천득, 민음사, 2026.
10년생 저자에게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소년미. 이렇게 솔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의 솔직함에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힘이 느껴집니다. 수필과 편지에서 자제분들에 대한 사랑도 느낄 수 있습니다. 책 말미에는 김지수 기자가 쓴 아드님 피수영 선생과의 인터뷰가 해제 대신 실려 있어 흥미를 더합니다.
10년생 저자에게 강하게 뿜어져 나오는 소년미
글에서 소년미가 강하게 느껴집니다. 수필의 특성상 저자의 평소 생각과 마음이 그대로 드러날 수 밖에 없습니다. 지독하게 솔직하고 무척이나 소탈하고 감정을 오롯이 표현해서 소년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이름 한 획을 잘못 적어서 부자가 못 된 모양이라거나, 술기운을 빌려서 대문을 막차고 들어가는 걸 못해 본 것을 아쉬워 하는 대목에서 새어 나오는 웃음을 참게 됩니다. 다만 서울이 아니라 경성부청 호적계 탓을 하는 대목에서 피천득 선생의 글임을 깨닫게 됩니다.
독자를 무장해제 시키는 솔직함
아사코를 세 번째는 만나지 말아야 했다고 합니다. 술을 못 하지만 못 마셔서 아쉬운 기회들을 정확히 기억해 두었다가 씁니다. 배운 적이 없지만 도산 선생을 스승이라 부릅니다. 시인 프로스트가 작별할 때 안아준 것을 두고두고 자랑으로 생각합니다. 저자의 끝없는 솔직함에 독자는 무장해제가 되고 맙니다. 저자의 큰 매력입니다. 스스로 소중한 사람들에게 얼마나 솔직했나 돌아보고 반성하게 됩니다.
자제분들에 대한 숨김없는 애정
따님에 대해서는 수필을 여러 편 할애합니다. 유학 중인 아드님에 대해서는 편지글에서 걱정과 응원이 느껴집니다. 훌륭한 자제분들을 염려하는 아버지의 마음이 글에 뚝뚝 묻어납니다. 눈 오는 서울 거리를 따님과 걷기를 소망하는 대목이 여러 번 등장하는데, 선생님의 뜻이 이뤄졌는지 궁금해지기도 합니다.
독특한 해제: 김지수 기자의 피수영 선생 인터뷰
책 말미에 해제 대신 “김지수의 인터스텔라”로 유명한 김지수 기자가 쓴 피수영 선생 인터뷰가 실려 있습니다. 저자가 워낙 솔직하고 쉽게 글을 쓰셔서 해제가 필요없겠다 싶던 중에 김지수 기자의 글이 등장합니다. 수필을 읽은 여운과 함께 읽기 좋습니다. “아버지의 아들이어서 그냥 좋았다”는 선생의 말이 부자 관계를 함축적으로 설명하는 것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책 속 문장들]
P. 59.
이 세상에는 책이 너무 많다. 학문을 하는 사람에게는 전문 분야의 책만 해도 바로 억압을 느낄 지경이요, 참고 문헌만 보아도 곧 숨이 막힐 것 같다. 수많은 명저, 거기다가 다달이 쏟아져 나오는 시시한 책들, 그리고 잡지와 신문이 홍수같이 밀려온다. 책들의 이름과 저자를 많이 아는 것만을 뽐내는 사람도 있다. 나는 문과 학생들에게 고전만 읽으라고 일러 준다. 그러나 그 고전이 너무 많다. 이대로 내려가면 고전에 파묻힐 것이다. 영문학사를 강의하다가 내가 읽지 못한 책들을 읽은 듯이 이야기할 때는 무슨 최를 짓는 것 같다. 그리고 읽어야 될 책을 못 읽어, 늘 빚에 쪼들리는 사람과 같다.
P. 198.
원래 나는 하늘에서 얻었다고 천득(天得)인데, 호적계의 과실로 하늘 천(天)자가 일천 천(千)자로 되어 버렸다. 이름 풀이하는 사람은 내가 부자로 살 것을 이름의 획수가 하나 적어서 가난하게 지낸다고 한다. 내가 부자로 못 사는 것은 오로지 경성부청 호적계 직원의 탓일지도 모른다.
P. 214.
내가 말을 너무 많이 하고 빨리 하여 위엄이 없다고 일러 주는 친구가 있다. 그래 나는 명성이 높은 어떤 분이 회석(會席)에서 말은 한마디도 하지 않고 눈만 끔벅끔벅하던 것을 기억하고 그 흉내를 내 보려 하였다. 그랬더니 이것은 더 큰 고통이었다. 가슴이 터질 것같이 답답하여 나는 그 노릇은 다시 안 하기로 하였다.
P. 220.
본래 소극적인 성질이라도 술에 취하면 평시에 품었던 잠재 의식을 발산시키고, 아니 취했더라도, 술잔 들면 취한 체하고 화풀이라도 할 텐데, 그리고 술기운을 빌려 그때나마 내가 잘났다고 생각하며 호탕하게 떠들어 볼 텐데, ‘문 열어라.” 하고 내 집 대문을 박차 보지도 못한다. 가끔 주정 한바탕하고 나면 주말여행 한 것같이 기분이 전환될 텐데 딱한 일이다.
P. 224.
나는 작은 놀라움, 작은 웃음, 작은 기쁨을 위하여 글을 읽는다. 문학은 낯익은 사물에 새로운 매력을 부여하여 나를 풍유(豊裕)하게 하여 준다. 구름과 별을 더 아름답게 보이게 하고 눈, 비, 바람, 가지가지의 자연 현상을 허술하게 놓쳐 버리지 않고 즐길 수 있게 하여 준다.

[링크][책] 악수도 없이 헤어졌다 – 피천득 (교보문고)
[링크][문학][민음북클럽 에디션] 홍계월전 – 작자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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