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쓰가루 – 다자이 오사무, 유숙자 옮김, 민음사, 2025.
대표작에서 느껴지는 절망감은 간 곳 없고, 저자의 친근하고 유쾌하며 소탈한 면모가 돋보입니다. 오랜 기간 떠나 있던 고향을 여행하면서 친척들과 지인들을 만나서 그런 것이겠지요. 저자의 어린 시절에 함께 하며 책과 글쓰기에 가깝게 해 준 다케를 만나면서 하이라이트를 이룹니다. 이 만남이 어린 시절의 정체성 그 자체가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훨씬 밝고 친근한 다자이 오사무
이미 읽은 다른 작품에서보다 훨씬 저자가 친근하게 다가옵니다. “인간실격”이나 “사양”을 읽고 느껴지는 참담함과는 거리가 멉니다. 오히려 유쾌하고 소탈한 면모를 보입니다. 저자가 도쿄에서 작품으로 이름을 얻은 후 2차 세계대전 중에 자신의 고향인 쓰가루 지방을 돌아보는 내용입니다. 실제 친척들과 지인들이 등장하고, 즐겁게 술잔을 기울이는 장면이 아주 많이 나옵니다. 물론, 술에 빠져 있어서 제대로 일을 하지 못한다는 등의 자조적인 언급도 있습니다. 그 부분에서 저자가 인간실격의 작가라는 점이 드러납니다. 그래도 전체적으로 오랜만에 찾은 고향과 지인들과의 만남으로 드러나는 설렘이 잘 느껴집니다.
낯선 일본의 지방을 친근하게 만드는 애정어린 묘사
대단한 것 아니라며 고향 지역에 대해 애정 담긴 설명을 이어갑니다. 일본 중세 문학에서 일부라도 언급되는 부분을 인용합니다. 객관적인 묘사는 일부 포기하지만, 그래도 애정어린 눈빛으로 자신의 기억과 함께 쓰가루를 설명합니다. 당시 현지에 살고 있던 지인들의 애정어린 설명을 더합니다. 저처럼 이 지역에 대한 정보가 전무한 독자도 그가 쓴 글을 따라 움직여 보고 싶은 마음을 품게 합니다.
그의 또 하나의 정체성, “다케”
이 여행의 하이라이트는 역시 다케와의 만남입니다. 책과 글쓰기를 좋아하는 저자를 있게 한 존재이기도 합니다. 결국, 이 모든 여행은 떠난 지 오래되어 잘 알지 못하는 고향 기행이 아니라, 소식이 끊겼던 다케를 만나기 위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외면하고 묻어두어도 “나는 누구인가”에 대한 대답은 언젠가 필요합니다. 그리 길게 묘사된 것도, 호들갑스러운 리액션이 있었던 것도 아니지만 충분히 그 만남의 온기가 느껴집니다. 이 책 전체에서 느껴지는 희망과 밝음은 결국 다케와의 만남 때문이었던 것 같습니다.
[책 속 문장들]
P. 47.
요컨대, 서로가 어른이 된 것이리라. 어른이라는 건 쓸쓸 한 법이다. 서로 사랑하면서도 조심하느라, 남남처럼 서먹서먹함을 떨치지 못한다. 어째서, 그리 조심스러워야만 하는 걸까? 그 답은 별거 아니다. 멋들어지게 배신당하고, 된통 창피를 당한 적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사람은 믿을 게 못 된다, 라는 발견은, 청년이 어른으로 이행하는 제1과다. 어른이란, 배신당한 청년의 모습이다.
P. 56.
아무튼 현실은 내 안중에 없었다. 믿는 데에 현실이 있는 것이고, 현실은 결코 사람을 믿게 만들 수 없다.”라는 묘한 말을, 나는 여행 수첩에 두 번이나 거듭 쓰곤 했다.
P. 146.
가나기 생가에서는, 신경이 피로해진다. 더구나 나는 나중에 이처럼 글로 쓰니까 글렀다. 육친을 쓰고, 그리하여 그 원고를 팔지 않고선 살아갈 수 없는 고약한 전생의 업을 짊어 지고 있는 남자는, 신으로부터 그 고향을 빼앗긴다. 결국 나는 도쿄의 누추한 집에서 선잠을 자고, 생가의 애틋한 꿈을 꾸며 그리워하고, 이곳저곳 헤매다가, 그러고는 죽을지도 모른다.
P. 186.
이렇게 쓰면서 나는 어렴풋이 쓴웃음을 짓고 있는데, 후카우라이건 아지가사와이건 그래도 내가 좋아하는 벗이 있어, 아아! 잘 와 주었네! 기뻐하며 맞아 주고, 이곳저곳 안내하며 설명도 해 주었다면, 나는 또 어이없이 자신의 직감을 버린 채 후카우라, 아지가사와야말로 쓰가루의 정수(精髓)다! 라며 감격스러운 필치로 쓰게 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니, 실제로 여행 인상기 따윈 믿을 게 못 된다.
P. 196.
오늘도 역시 화창한 날씨다. 내 머리는 몽롱하다. 숙취기 미다. 하이칼라초 집에는 무서운 사람도 없는 터라, 어젯밤 조금 지나치게 마셨다. 진땀이 흥건히 이마에 배어 나온다. 산뜻한 아침 햇살이 기차 안으로 비쳐 들어, 나 홀로 흐리멍덩 하니 지저분하고 부패한 듯, 정말이지 참을 수 없는 기분이다. 이러한 자기 혐오를, 술을 과하게 마신 뒤엔 어김없이, 아마도 수천 번 되풀이 경험하면서도, 아직껏 술을 과감히 끊을 마음이 일지 않는 거다. 이 술꾼이라는 약점 때문에, 나는 이러니저러니 남한테 업신여김을 당한다. 세상에 술이라는 물건만 없었던들, 나는 혹여 성인이 될 수도 있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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