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바벨1, 2 – R. F. 쿠앙, 이재경 옮김, 문학사상, 2025.
재기발랄한 상상력으로 신선한 설정에서 시작했지만 의문스러운 구호와 논리로 다 읽고 나면 고개를 갸웃하게 만드는 SF소설.
재기발랄한 상상력
R. F. 쿠앙은 옐로페이스에서 선보인 재기발랄한 상상력이 단발성이 아님을 알립니다. (옐로페이스가 나중 작품이긴 합니다.) 옥스퍼드 대학교 내 건물 최상층에 번역원이 있고, 제국주의 영국이 이 옥스퍼드 번역원을 통해서 은으로 세계 경제를 좌우하는 이야기입니다. 어원이나 번역되는 어휘를 통해 일종의 공명을 만들어 내고, 그 공명으로 은막대가 어휘의 의미만큼 영향력을 행사합니다. 전 세계 경제나 건축이 모두 이들 번역가들에게 의존하는 구조가 만들어져 있는 식입니다. 이 건물과 옥스퍼드를 방어하기 위해 번역원 교수들은 결계를 치고 역시 은막대에 각종 어휘를 새겨 보호합니다.
수상한 명제들
하지만 캐릭터들의 대화 속 이야기에 자꾸 물음표가 떠오릅니다. 이 책이 더 많은 찬사를 받았어야 하는 것처럼 이야기가 들리지만, 그 정도 찬사면 충분한 것 같습니다. 주인공 로빈은 옥스퍼드 교수들의 협조 하에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수출해서 무역 적자를 해소하려는 시도에 크게 반발합니다. 결국 실습을 겸한 출장에서 영국의 아편 수출 시도를 무산시키고, 나아가 자신의 아버지이자 번역원 교수인 러벨을 해하게 됩니다. 대의를 위해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생명을 함부로 대하는 것은 신선하지도 않고 충분히 합리화되지도 않은 것만 같습니다.
평면적인 국제 관계와 급작스러운 대의명분
정치는 복잡하고 외교는 훨씬 더 복잡합니다. 1800년대 중국과 영국의 관계는 그렇게 단순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아편 거래로 국제관계를 그렇게 평면적으로 선을 긋고 나면 등장 인물들의 선택과 대사에 동의하기 어려워집니다. 국가간의 관계는 상대적인 것일 뿐, 단순히 선과 악으로 가를 수 없기 때문입니다. 청나라도 패배했을 뿐, 제국주의 흐름을 따랐다고 생각합니다. 소설의 탈을 쓰고 있지만 금본위제나 미국을 비판하는 것으로 읽히기도 합니다. 시작 단계의 설정과 상상력의 신선함에 비해 뒤로 갈수록 로빈과 그 친구들의 선택과 이야기에 동의하기 어려워집니다. 전체적으로는 아쉽게 느껴졌습니다.
[책 속 문장들]
바벨1, P. 258.
물론 정답은 없어. 자네들 이전의 어떤 이론가도 풀지 못한 문제야. 우리 분야에서 현재진행 중인 논쟁이지. 슐라이어마허는 외국어 텍스트인 것이 확연히 드러날 만큼 번역이 부자연스러워야 한다고 주장했어. 그는 번역사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다고 했어. 저자를 가만히 두고 독자를 저자 쪽으로 옮기거나, 독자를 가만히 두고 저자를 독자 쪽으로 옮기거나. 슐라이어마허는 그중 전자를 택했지.
바벨1, P. 386.
로빈은 생각했다. 기억 전체를 은에 새길 수 있다면, 그래서 앞으로도 오래도록 몇 번이고 다시 발현하게 할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다게레오타이프의 잔인한 왜곡이 아닌, 감정과 감각 의 순수한 정제가 가능하다면. 그런 불가능이 가능하다면. 단지 종이와 잉크로는 이 황금빛 오후를, 모든 다툼을 잊고 모든 잘못을 사한 막역한 우정의 따스함을, 싸늘한 교실의 기억을 녹이는 햇살을, 그들의 혀에 닿은 끈적한 레몬 맛과 놀랍고 기뻤던 안도감을 표현할 수가 없었다.
바벨2, P. 205.
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핀이 옳았다. 격발 순간의 짜릿함. 손아귀에 담긴 힘의 폭발. 손가락을 까딱하는 것만으로 촉발되는 가공할 힘, 그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링크][책] 바벨1 – R.F. 쿠앙 (교보문고)
[링크][책] 바벨2 – R.F 쿠앙 (교보문고)
[링크][문학] 옐로페이스 – R.F. 쿠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