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 남극 – 클레어 키건, 허진 옮김, 다산책방, 2025.
표제작이 재탕이어서 얼굴을 찌푸리고 읽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금방 감정이 누그러집니다. 짧은 분량에서 묵직한 공감을 이끌어 내는 저자의 내공에 다시 감탄하게 됩니다. 원초적 감정에 집중한 작품들이어서 제게는 더 매력적으로 다가왔습니다.
표제작이 재탕이라니
표제작 재탕은 너무합니다. “남극”은 6개월 전 출간된 저자의 전작 “너무 늦은 시간”에 포함된 작품입니다. “너무 늦은 시간”이 120 페이지 양장본 책이었으니까, “남극”을 제외했다면 70 페이지 남짓한 책이 되었을 겁니다. 저자가 많이 쓰는 작가가 아닌 탓도 있겠지만, 여전히 납득하기는 어렵습니다. 시간적으로는 “남극”이 저자의 첫 소설집이고, 다른 작품의 인기 덕분에 이 소설이 출간될 수 있었던 점을 감안하기로 합니다.
15분 만에 냉장고 속 재료로 만든 파인 다이닝처럼
저자가 가진 특유의 설득력이 돋보입니다. 짧은 분량 속에서 특유의 호흡으로 독자를 이끌어 가는 힘이 강력합니다. 소재만 놓고 보면 자극적이어서 독자 설득이 쉽지 않아 보이기도 합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군더더기없이 짧은 글에서 독자들의 공감을 끌고 결론으로 향합니다. 공간은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생소하지만, 그들도 서로 사랑하고, 상처를 주고 받으며, 두려워합니다. 일상의 나른함을 느끼는 것도 잠시, 독자가 경험했거나 한번 쯤은 들어보았을 법한 이야기 속으로 데려갑니다. 저자는 짧은 시간에 독자를 강력하게 설득하고, 바로 그 지점에서 이야기를 마무리합니다. 독자들은 각자의 냉장고에 있는 재료인 경험과 감정으로부터 15분 만에 나온 파인 다이닝을 즐길 수 있는 셈입니다.
원초적 감정이어서 더 매력적인
돌이켜 보면, 어떤 면에서는 이 단편집의 작품들이 돋보이기도 합니다. 다양한 삶의 순간들을 포착해서, 거기서 느껴지는 갈등과 감정을 풀어냈기 때문입니다. 감정 자체에 충실할 뿐, 그에 대해 어떤 판단을 내리지 않는 점이 매력적이었습니다. 다른 작품에서 느껴지는 저자의 관점이나 독자들에게 이야기하는 당위성 (굳이 여기에 반대하거나 반감을 가진 것은 아닙니다) 이 이 작품에서는 덜 드러나서 더 매력적으로 느껴졌습니다.
[책 속 문장들]
P. 120.
엄마가 내 손을 꽉 잡고 있었다. 바람이 불어 뒤로 펄럭거리는 어머니의 잠옷 자락. 우리는 꼭대기의 꼭대기에 도착해서 똑바로 누워 별을 보았고, 놋쇠빛 의 머리카락을 가진 어머니는 정신 나간 소리를 했지만 전혀 말이 안 되는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우리가 감지하지 못하는 것을 느꼈다. 개가 도로의 자동차 소리를 제일 먼저 듣듯이.

[링크][책] 남극 – 클레어 키건 (교보문고)
[링크][책] 너무 늦은 시간 – 클레어 키건
[링크][문학] 향성 – 나탈리 사로트